생활정보

몇 년 전 <삼시세끼>의 소소한 즐거움을 표현하는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이 연작을 낼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들 삶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켜서 집안의 많은 남자들이 부엌의 선을 넘게 했다. 이제는 방송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음식을 요리사가 아닌 아마추어 출연자가 나와서 만들어가는 과정을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인류의 문화는 식탁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식탁에서의 주역은 음식과 함께 그것을 담는 그릇이었으며 그 외에 스푼, 포크, 젓가락, 나이프 등의 커트러리가 있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생활의 기본 격식을 의미했기에 예로부터 식기는 개인의 삶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어떤 종류의 그릇과 커트러리를 사용하는지가 신분과 부를 상징해왔다. 우리가 은식기로 알고 있는 서양의 은제품 테이블웨어는 상류사회 식탁문화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은과 구리가 섞인 합금의 형태로서 특별히 스털링이라 부르며 나라마다 은과 구리의 비율이 조금씩 달랐다. 이러한 은은 금과 함께 매우 고가의 자산이었기에 당시 유럽 각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은 보유량이 곧 국가의 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순금 제품에 태극마크를 찍는 것과 같은 제도로서 스털링임을 국가에서 인증해주는 홀마크(hall mark) 제도를 각 나라마다 도입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은제품에 각 나라 특유의 홀마크를 찍는 것은 법적 표준에 맞는 합격 판정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홀마크는 상거래에서 정직함의 시작이었다. 은은 인류 역사에서 글로벌 무역을 이끌게 한 주역이기도 하다. 16세기 초에 남미 대륙에서 많은 양의 은이 발견됨으로써 유럽은 오랜 은의 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귀족과 왕족들의 귀한 전유물이었던 은이 스푼으로 만들어져 일상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다. 17세기 들어 영국에서는 손잡이 끝에 12사도의 상을 새긴 은으로 만든 12개의 사도 스푼이 등장했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아기의 첫 세례식에서 아기의 대부가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며 주는 선물이었다. 은수저는 은의 고결한 특성과 복된 삶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선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라는 말은 이러한 유럽 귀족사회의 풍습과 무관하지 않다. 귀족의 자식들이 아니고서는 값비싼 은 식기를 사용할 수 없었으니 귀족이라 함은 실버 라이프를 향유하는 삶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용하는 식기의 종류가 신분을 가늠했던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잘 담아낸 그릇으로는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백자가 있다. 여기에 덧붙여 서양의 스털링과 같은 합금으로 만들어진 유기, 즉 놋그릇이 있다. 스털링이 은과 구리의 합금인 것처럼 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전문적으로 놋그릇을 다루는 상설기구를 설치할 만큼 놋그릇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고, 고려시대에는 각종 생활용기가 유기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에서 동을 채굴해 유기의 생산을 장려했고 놋그릇을 전담 생산하는 ‘유장’이 있었다. 은이 독에 반응하는 것처럼 놋그릇 또한 독성 있는 음식을 담아내면 바로 시커멓게 변색된다. 이러한 항독성의 성질로 인해 조선의 왕실과 양반가에서는 놋그릇을 즐겨 썼고, 촛대, 세숫대야, 담배합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만들어졌다. 특히 반상기는 예법을 중요시했던 사대부 식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기로 된 반상기를 정성스럽게 사용하며 관리하는 것은 안방마님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였다. 아득한 어린 시절에 명절을 앞두고 마당에서 제사에 쓸 놋그릇을 모두 내어놓고 어른들이 함께 모여 닦았던 모습이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렇게 잘 닦아 윤이 반짝 반짝 나는 유기그릇은 때로는 조상을 위한 의식인 제례에 쓰였고 때로는 집안의 어르신을 위해 마련한 소반 위에 놓여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날마다 가장 친숙하게 지켜나가고 있는 의식은 삼시세끼를 챙겨 먹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식사에서 어떤 식기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한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서양에서는 스털링이 상류층의 식탁을 장식했고 동양에서는 도자기와 유기그릇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코로나의 유행을 끊지 못하고 또 새해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 새해가 다가왔고 우리 모두 다시 한 살을 더하는 기념으로 떡국 한 그릇을 먹게 될 것이다. 너나없이 희망을 얘기하는 새해 아침 우리 가족들만을 위해 따뜻한 떡국 한 상을 멋지게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직한 상판과 아름다운 문양이 고운 자태를 뽐내는 소반 위에 정직함과 건강함의 상징이었던 유기그릇을 올려보자. 정성껏 마련한 고명으로 멋을 낸 떡국 한 그릇을 받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밝은 얼굴에서 새해의 희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새해의 첫날을 맞으며 가족과 함께 건강하게 신년 떡국상을 맞이할 수 있음을 감사하자. 딱히 스털링 그릇이나 유기그릇이 아니어도 평소 내는 반찬부터라도 정갈하게 접시에 담아내어 보자. 우리 가정에서부터 소중하게 존중받는 가족들에게서 새해 사회생활의 평안함을 기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멋을 내어 냅킨, 수저받침 등을 세팅 해본다면 우리 집, 우리 가족의 식탁 품격이 달라질 것이다. 새해 다짐 중 하나로 올해는 ‘가족 모두 모여 먹는 따뜻한 집밥’을 일주일에 몇 번 먹을 것인가? 의논하는 시간만으 로도 따뜻한 홈문화가 피어날 것이다.

PROFILE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 대표.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문화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 yigo_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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