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커피 한 잔인 일상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부는 이 좋은계절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오늘도 집에서 누릴 수 있으니 복잡한 세상사 속에서 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린 시절 엄마는 집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장미꽃이 그려진 영국산 커피잔에 홍차를 우려내어 각설탕과 함께 대접하곤 하셨다. 엄마가 우려내는 홍차 향과 거기에 곁들여지는 각설탕이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이미 중년이 돼버린 나이인데도 아플 때나 우울할 때 기운을 북돋워주는 음식목록 1위는 어린 시절에 엄마가 해주었던 음식이다. 지금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하는 엄마의 손님 초대와 애프터눈 티 파티는 이제 어른이 된 나에게 익숙한 문화가 되어 내 곁에 함께하고 있다. 지금은 여행길이 막혔지만 유럽을 여행할 때 특히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찻잎을 파는 전문 숍이다. 커피가 대세인 미국에 비해 아직도 유럽 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차 문화는 15세기 말 지리상의 발견 때부터 이어지는 유럽 근대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16세기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 거의 동시에 들어온 세 가지 외래 음료로 커피, 초콜릿, 차가 있다. 남미 대륙으로부터 초콜릿이 들어왔고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했던 터키 대사로부터 커피가 전해졌다. 차의 전파는 16세기 해상무역의 큰손이었던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일찍이 중국 항로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동남아 항로를 개척했던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일본과의 교역에서 차를 처음 접했다. 16세기 초 유럽에 차를 소개한 서양의 선교사들에게 일본의 다도문화는 매우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들에게알 수 없는 미지의 음료와 이 음료를 담아내는 도자기는 넘볼 수 없는 선진국의 기술이자 문화였다. 손님들에게 존경과 환대를 나타내기 위해 신분이 높은 영주들이 직접 우려내는 차는 서양인의 눈에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느껴지는 신비의 음료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유럽 상류층에게 차 문화의 선진국으로 인식되어서 결혼을 앞둔 많은 귀족 아가씨들은 네덜란드에서 차 문화를 배우는 신부 수업을 하기도 했다. 상술에 뛰어났던 당시의 네덜란드 상인들은 동양의 차를 통해 큰 부를이룰 수 있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그들은 차의 효능을 건강에 좋은 만병통치약의 개념으로 소개했고 값비싼 차는 사치스러웠던 귀족들의 허영심을 부추겼다. 특히 차가 영국 귀족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계기는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공주 캐서린 브라간자를 통해서다. 그녀는 혼수품으로 7척의 배 안에 값비싼 차와 향신료, 설탕을 실어왔다. 그녀가 영국 땅에 도착해서 처음 한 일은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대령하라는 것이었다. 따뜻한 고국을 떠나 사계절 음습한 영국의 궁중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차를 가까이 하게 했다. 남편의 바람기로 외로운 왕비는 귀족 부인들을 궁으로 초청해 티 파티를 자주 열었다. 캐서린의 차 마시는 습관은 모든 문화가 그렇듯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귀족층에게로, 그다음으로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거부가된 부유한 상공인에게로, 또 그러한 상류층을 모방하고픈 중산층에게로까지 차를 향유하는 문화가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차가 인기를 얻게 되었던 커다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의 음습한 날씨와 좋지 않은 식수 문제였다. 영국 사람들은 급격한 도시화로 열악해진 환경으로 인해 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다. 그들은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물 대신 약간의 살균 효과가 있는 맥주와 일종의 술인 에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셨다. 영국인들의 하루 시작과 끝은 술이었고 그 술로 인한 병폐는 사회 곳곳에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혁명기에 술은 노동자들이 일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했다. 금주운동이 절박한 국가적 문제로 인식되었을 때 술독에 빠진 영국인들을 구제한 것은 왕이나 의회의 유력한 정치가들이 아닌 바로 차였다. 따뜻한차 한 잔은 금주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때마침 1840년대 중국을 벗어나 인도 등의 식민지에서 차를 재배함으로써 가격이 하락했고 이는 차의 대중화로 이어졌다. 저렴해진 차 가격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노동자들도 가정이나 직장에서 술 대신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동양에서 온 귀한 약이자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던 차가 마침내 영국의 모든 계층에서 향유하는 문화가 되었다. 불볕더위가 지나고 이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따뜻한 차 한 잔이 더욱 그리운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번 가을, 카페 하면 떠오르는 정겨운 대화와 눈 맞춤을 우리 집 거실의 예쁜 테이블에서 차 한 잔과 함께 시작해보자. 그것이 품격 있는 티 파티 테이블 세팅과 함께라면 더욱 좋고 두툼한 라인을 자랑하는 넉넉한 머그잔이면 어떠하랴. 지난여름 유례없는 코로나와 불볕더위로 우리의 심신이 지쳐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편한 우리 집 거실에서의 차 한 잔으로 토닥토닥 위로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코로나 걱정없이 가을의 낭만과 차향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우리 집 거실이라는 사실이 서글픈 현실이 돼버린 지 오래지만 오히려 아늑한 집을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준 것이기도 하다.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2021년 가을은 우리에게 한 번만 주어진 아름다운 시간이기에 선물 같은 이번 가을의 낭만을 놓치지 말고 즐겨보자. 이 또한 지나가 <응답하라 1988>이라는 추억의 드라마가 정겨웠듯 코로나로 힘들었던 우리들의 젊은 날을 미소 지으며 떠올릴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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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 대표.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문화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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