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정보

겨울날, 차 한 잔의 위안

창밖에 부는 바람소리만으로도 한겨울 추위가 느껴지는 겨울밤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늑한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루의 피로를 달래주는 따끈한 차 한 잔으로 나를 위로하기에 겨울만큼 좋은 계절이 있을까 싶다. 사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일 생각나는 것은 구수한 향의 커피일 것이다. 몸을 깨우듯 마음을 깨우는 각성제처럼 커피향은 이제 우리의 일상에 익숙해져버렸다. 골목길마다 보이는 크고 작은 카페와 여행지의 좋은 장소마다 들어선 카페가 말해주듯이 우리들의 커피사랑은 카페사랑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강력한 커피의 위세가 오히려 커피 저편에 있는 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걸까. 이제는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다양한 차가 메뉴판을 차지하고 손님들도 차를 즐겨 찾고 있다. 슬그머니 골목길에 홍차 전문점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고 젊은이들이 즐기는 대중적인 차 전문점이 생겨난 것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지금은 방문하기가 어려워졌지만 해외여행 후기 블로그에 티파티를 즐기는 내용을 담은 사진도 종종 보이니, 조만간 커피만큼이나 차를 즐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평소에 커피보다는 차를 즐겨 마시는 편이고 오랜 시간 모아온 소장품 중 많은 것들이 홍차와 깊은 연관이 있어서인지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근대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홍차만큼 여러 역사적인 사건에 원인이 된 것도 없다. 중국의 차 맛을 새롭게 알게 된 영국인들은 다량의 차 수입으로 무역역조가 커지자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보스턴 차 사건 또한 홍차가 그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었다. 15세기 후반 대항해시대 이후 16세기를 거쳐 17세기에는 차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중국으로부터 도자기로 된 진귀한 찻잔 또한 많이 수입되었다. 이런 고가의 중국 자기로 값비싼 차를 마시는 것은 귀족들에게 그들의 부와 높은 지위를 과시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귀족들은 차 도구를 손에 든 초상화를 그리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18C 무렵 서양인들은 빛이 투과될 정도로 얇지만 내구성이 뛰어나고 우아한 중국 자기에 열광했다.

1840년대 중국을 벗어나 인도 등의 식민지에서 차 재배가 성공하면서 차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국의 ‘애프터눈 티’ 문화가 생겨났다. 애프터눈 티 문화의 발생은 산업혁명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정용 램프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깨어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저녁식사 시간도 점점 늦어지게 되었다. 즉 점심과 저녁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허기를 느끼게 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점심과 저녁 사이에 마시게 된 차가 바로 애프터눈 티의 기원이다. 당시 차는 ‘약’으로 취급되었기에 공복에 마시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애프터눈 티에는 빵과 버터, 설탕과자, 비스킷 등의 티푸드가 함께 서빙되었다. 세계적인 영국의 홍차 회사인 ‘포트넘 앤 메이슨’사의 로고 시계는 지금도 항상 4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바로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지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식탁 문화의 화려함이 정점을 이루었던 영국 빅토리아시대 후반기가 되면서 차 문화는 더욱 화려해져서 3단 트레이가 등장하게 되고 티파티에 빼놓을 수 없는 스콘 역시 이때 등장하게 된다. 3단 트레이에 놓이는 음식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에는 속을 든든히 해주는 샌드위치, 가운데는 스콘 등의 베이커리, 맨 위에는 달콤한 초콜릿, 마카롱 등이 차지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시간과 돈을 들이며 갖는 티타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차가 주는 물리적 의미보다는 차를 앞에 두고 갖는 휴식에서 느끼는 위로와 편안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얼마 전 제주도 여행에서 우연히 한라산 기슭에 있는 다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녹차 밭에서 직접 우려낸 구수한 녹차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한적한 녹차밭을 찾은 손님들의 대부분이 젊은 20대들이어서 놀라웠다. 커피만 즐긴다고 생각한 젊은이들이 아늑한 다원의 여유로움을 즐기며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디지털시대에 바쁘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녹차밭의 아날로그적인 차 한 잔의 여유가 그들에게 조그만 휴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년간이어진 코로나로 우리들의 심신도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빠르고 편안한 것이 대세인 우리들의 삶이지만 기왕에 매일 접하게 되는 티타임이라면 어쩌다 한 번쯤은 아날로그적인 느긋함에 흠뻑 취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편리하고 간편한 것은 그저 그것으로 끝나는 단답형의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길게 여운이 남는 나만의 조용한 티타임은 우리를 사색의 시간으로 이끌 것이고 긴긴 겨울밤의 위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좋아하는 잔을 꺼내 따뜻하게 데우고 사두었던 홍차 잎을 우려내어 볕이 좋은 창 앞에 앉아보자. 홍차의 은은한 색과 향기가 야단스럽지 않게 거실 한편을 가득 메울 것이다.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고, 견뎌야 할 것도 많은 일상이지만 홍차 한 잔의 여유는 분명 많은 위안이 될 것이다. 끝을 모르는 코로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하염없이 방해하며 2년을 넘겼고, 만남과 우정의 소중한 의미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어쩌면 소중한 만남은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적을 수록 더 진솔한 만남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긴긴 겨울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정말 보고픈 친구 한두 명을 불러 조그만 티파티를 해보자.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어 어여쁜 찻잔 한두 잔을 더 세팅할 수 있다면 기쁨은 배가되고 우리의 겨울날은 따뜻하게 피어날 것이다.

PROFILE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 대표.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문화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 yigo_gallery

저작권자ⓒ ㈜조선뉴스프레스 여성조선 2022년 2월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